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(문단 편집) === 말년 === 북한을 떠나기 직전까지 조선어를 거의 못 하던 찰스 젠킨스나 래리 앱셔와는 달리 드레스녹과 페리쉬는 조선어도 빨리 배우고 북한의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. 드레스녹은 자신의 고향에 사는 것처럼 편안하다고 BBC 방송국 기자들 앞에서 몇 번에 걸쳐서 이를 강조했을 정도였다. 본인은 [[군관]]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하였으며 자식은 [[평양외국어대학]]에 다녔다고 한다.[* 북한에서 외국어대학을 졸업하면 즉시 외교관으로 임용된다.] 본인은 "내가 미국에 있었으면 잡일이나 했을텐데, 내가 자식들을 대학 근처나 보낼 수 있었겠냐?"며 북한 정권을 찬양했다. 드레스녹이 살아온 배경 자체가 불우하였던 것을 볼 때 이는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. 오늘날에도 미국의 대학 입학률은 50%가 채 못 되며 드레스녹이 살았던 농촌 지역은 30%마저도 안 된다. 미국 변두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마을 생활 수준을 생각하면 되려 미국에서는 북한에서 받은 대우나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XLbKeLjlE0U&t=23s|생활 수준을 영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.]] 반면 북한의 경우 대학 교육 자체가 무상이기 때문에 드레스녹은 자식 3명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.[* 물론 유상이고 무상이고를 떠나서 체제선전에 이용된 인물이었던 만큼 학비가 유상이었더라도 북한 정권에서 지원했을 것이다. 북한의 대학 진학률은 미국보다 높은 것도 아니고 현저히 낮은 15% 수준이다.] [[2001년]]에 제임스 드레스녹이 60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김정일은 [[환갑]] 축하한다고 그에게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. [[고난의 행군]] 시절에도 평양에서 굶지 않고 유복한 삶을 살았으며 드레스녹은 이 일에 대해서 김정일을 찬양하며 미국과 서방을 비난하는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반복했는데 매일 800g의 쌀 배급을 받았다고 한다. 현재 한국 식당에서 사 먹는 공기밥이 200g이 채 안되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 세 끼 공기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며 한 달에 24킬로그램이다. 다큐멘터리 《푸른 눈의 평양시민》에 나온 드레스녹은 현지인 수준의 유창한 [[문화어]]를 선보였는데 자신을 "아서 선생"이라고 부르는 [[평양]] 시민들과 농담도 유창하게 주고받을 정도였다. 살도 꽤 찐 것으로 봐서는 북에서 받은 대우는 좋은 것 같다. 되려 폭식과 폭연으로 인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였는데 특권층인 평양 시민들조차 [[비만]]으로 인한 [[성인병]]에 걸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후한 대우를 받고 산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. 《푸른 눈의 평양 시민》을 찍는 와중에도 기침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잠시 인터뷰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고 드레스녹의 주치의가 드레스녹의 건강이 [[영 좋지 않다]]고 설명하는 장면도 있었다. 그래도 76세까지 생존해 [[UN]] 통계에 의한 북한 남성의 평균 수명인 70세보다 오래 살았다. 드레스녹은 엄연히 김씨 일가가 직접 챙겨준 특권층으로, 의료 혜택도 꽤 잘 받은 편이라 오래 살았을 것이다.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[[찰스 로버트 젠킨스]]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젠킨스가 북한에서도 계급을 내세워 선임 노릇을 하려 하자 그를 주먹으로 후려갈긴 이후 서로 눈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. 이후 젠킨스는 너무 늙어 기운이 없어진 데 반해 그의 아내는 성관계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지만[* 젠킨스의 아내 소가 히토미는 젠킨스보다 19세나 어렸다.] 눈치가 없었던 젠킨스는 그걸 몰랐고 이에 본인이 젠킨스의 아내를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[* 소가 히토미의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.] 그것을 젠킨스가 봤다고 한다. 이후 다시는 젠킨스네 가족이 드레스녹의 집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. 젠킨스가 일본에서 펴낸 [[자서전]]에 서술한 자신에 대한 묘사를 읽고는 '어따 대고 사기를 쳐? 젠킨스를 죽여버리고 싶다'며 화를 냈다. 드레스녹은 "그 자식이 나한테 서른 번이나 맞았다고? 개자식! [[탈영]]죄로 30년형에나 처해져라!"라며 그를 저주했는데 미 육군은 고작 젠킨스 병장을 30일간 영내 대기(외출 금지) 처분했고 이후 고령을 이유로 [[퇴역]]시켰다.[* 젠킨스의 형이 선고되기 직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[[조지 워커 부시]]가 재선에 성공했다. 그런데 이게 젠킨스에게는 천운이었다. [[일본 정부]]에서 부시에게 젠킨스를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고 부시는 젠킨스에게 선처를 베풀었다.] 법적으로 육군 보병병장 계급을 유지했던 젠킨스는 새 육군 피복과 그간 밀린 급료 일체를 지급받고 얼마 뒤 퇴역할 때까지 보직도 받아 그에 따른 급여와 수당까지 받으며 사실상 영내에서 생활하는 것 빼고는 다른 군인들처럼 근무했다고 한다. 거기에 육군 [[사병]]들이 3년에 한 번씩 일정 수준의 징계를 받지 않으면 자동으로 받는 "Army Good Conduct Medal"이라는 메달도 받았다. 다만 탈영에 대한 벌로 계급은 [[불명예 전역|이병(private)으로 강등되어 퇴역했다.]] @JamesDresnok이라는 해시태그를 쓰면서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[[트위터]] 계정이 있으나 평양의 일반 인터넷은 외부와는 연결되지 않으므로 드레스녹 본인이라기보다 일부 장난기 있는 유저들이 만든 드레스녹을 사칭하는 유령 트위터 계정일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. 애당초 이 양반이 70대에 사망했는데 그 나이에 IT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쓰기 힘든 트위터를 폐쇄 사회에서 수십 년간 있던 사람이 쓸 리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. 이런 장난 계정은 [[페이스북]]의 [[고려항공]] 계정 및 [[김정은]], [[김정일]] 등도 있다. 하지만 1970년 [[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|요도호를 납치했던]] [[적군파]] 일원들이 평양에서 살면서 SNS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보면([[https://twitter.com/yobo_yodo|해당 트위터 계정]][* 꼬꼬무에서 통일부측에 허락을 받고 직접 트윗을 보내 확인했다.]) 드레스녹도 죽기 직전까지 SNS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. 또 그의 아들을 인터뷰했던 재미교포 [[노길남]] 씨가 '''"예전부터 드레스녹과 나는 잘 알던 사이고, 친한 사이다."'''라고 주장한 걸 봐선 트위터를 했을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. 결국 [[중풍]]으로 한동안 투병한 끝에 20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평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부 인사들을 통해 들은 대북매체가 밝혔다.[[http://m.news.naver.com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0&oid=001&aid=0009177831|#]] 2017년 북한 당국이 그가 중풍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고 그의 아들 두 명이 재미 언론인 노길남이 생전에 그와 대담하기도 했다. 그의 두 아들은 순수 백인 외모임에도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꽤 우대받으며 자란 만큼 완벽한 [[서북 방언]]으로 미국을 비방하며 [[김정은]]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